어린 시절 저는 제 생일일 때
"네 생일은 너를 위한 날이 아니라 니가 태어나게 해준 나에게 감사하는 날이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저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고 혼자 방치되어 자랐습니다.
늘 화가나 있던 그 여자(어린 시절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는 자신이 기분 나쁠 때마다 저에게 온갖 화풀이를 하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겨우 초등학교 2~3학년이었던 저는 하루 종일 혼자(외동) 외롭게 집에서 엄마를 기다렸는데
집에 온 엄마는 아무 이유도 없이 저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하고 회초리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때 그 여자의 얼굴 표정은 광기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왜 혼나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 여자의 화가 너무 무서워서
매일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면서 엉엉 울면서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그냥 살기 위해 그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면서 엉엉 울던 아이.
힘이 없어서......... 매맞는 것이 무서워서........ 욕하는 그 여자의 눈빛과 말투가 무서워서........
저는 그렇게 무릎을 꿇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는지 모릅니다.
혼나고 맞는 이유를 늘 몰랐기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저 여자는 나를 그냥 싫어하는구나.'
그런 날들이 연속되면서 열 살 남짓한 나이에 저는 포기했어요.
사랑받는 것, 엄마라고 부르는 것.
어린 저는 그때 생각했거든요.
"이 사람은 내 엄마가 아니다. 진짜 엄마일리가 없어. 내 엄마는 다른 사람일거야."
그런 정서적 학대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럴거면 왜 나를 낳았는데?'라는 생각을 늘 하게 되더라고요.
내 존재에 대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그 여자는 내 생일이면
"니 생일은 너를 위한 날이 아니라 부모에게 감사하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와 축하를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게 저는 수많은 감정적인 괴로움을 안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저는 성인이 되어서도 20년이 넘게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했습니다.
저는 그냥 무조건 부모에게 복종하고 빚을 갚아야 하며 무조건 감사를 해야만 한다는 메세지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그런 제 돈을 매달 꼬박꼬박 받아가면서도
저에게 진지하게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 스스로의 치유와 저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치유를 위해 이 블로그를 만들었으니 오늘은 어린 시절 이 기억을 치유해보고 싶습니다.
나의 상황은 부모님의 사랑과 인정 부족과 정서적 학대로 인해 발생한 깊은 정서적 상처를 반영한다. 생일이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를 낳아준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것이라고 들으며 자라는 것은, 특히 나의 존재에 대해 사랑받거나 축하받은 적이 없다는 맥락에서, 상당한 정서적 갈등을 일으킨다.
1. 감정적 단절과 자존감 부족
- 문제 : 부모님께 빚진 존재라는 메시지를 받으며 자라면서, 있는 그대로 사랑받거나 축하받지 못하면 자존감이 침식될 수 있다. 자신의 가치가 단순히 자신의 권리에 따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이는 무가치감, 원망, 세상에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에 대한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 해결책 :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감사를 표했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나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나의 자존감을 회복 하는 과정을 시작하자.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편지를 쓰거나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과 같은 자기 연민 실천에 참여하면 초점을 다시 자신의 가치와 필요에 맞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종종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면 눈을 감고 그 시절 어렸고 힘이 없어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찾아가 꼭 안아주는 상상을 한다. "너는 잘 자랄거야. 걱정마. 니 옆에는 너를 사랑해주는 다른 사람들이 정말 많이 생길거야."라고 말해주고 내 가슴 속에 시커멓게 있던 상처를 꺼내 강물에 흘려보내는 상상을 한다.
2.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 고통과 확인 추구
- 문제 : 내가 경험한 정서적 학대는 사랑이나 인정의 부족과 결합되어 거부감과 처리되지 않은 슬픔의 잔여감을 남길 수 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인정과 사과를 갈구할 수 있지만, 부모님은 그것을 기꺼이 제공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일부가 해결책을 추구하지만 외부에서 그것을 받지 못하는 내면의 갈등을 만든다.
- 해결책 : 감정적 치유는 종종 자신의 경험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 나 자신의 고통과 감정이 진짜라는 것을 인정하자. 치료나 지원 그룹을 찾는 것은 이 고통을 처리하고 성장하면서 얻지 못했던 확인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일기를 쓰거나 창의적인 출구를 탐색하는 것도 이러한 감정을 표현하고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문학작품 속에서 나와 비슷한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많은 치료를 받았다.
어느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덜었던 날이 있었다.
그 때 내가 만난 책 속의 구절은 이것이었다.
"너를 이곳에 보내신 이가 너와 함께 한다"
3. 죄책감과 의무의 악순환 끊기
- 문제 : 나를 키워준 부모에게 "빚졌다"는 생각은 의무감이나 죄책감을 느끼게 하여 나 자신의 정서적 필요를 우선시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는 상호적인 보살핌이나 사랑이 없고 대신 정서적 학대를 견뎌냈을 때 특히 문제가 된다.
- 해결책 :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경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감사를 표하는 것은 자신의 웰빙을 희생하는 행위가 아니다. 특히 부모님가 해를 끼쳤다면 더욱 그렇다. 감정적 경계를 정하면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기대와 분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을 찾고 웰빙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만들어 나 자신의 행복을 되찾는 데 집중하자.
나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된 사과를 하지 않는 부모에게 의무감과 죄책감을 갖지 말고 나 자신의 행복을 찾는데 집중하자.
4. 자기 축하와 지원 시스템 구축
- 문제 : 나는 단순히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축하받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특히 생일과 같은 경우에. 나의 존재에 대한 축하의 부족은 나 자신이 사랑이나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공허함을 만들어낼 수 있다.
- 해결책 : 나 자신을 축하하는 의식이나 관행을 만들자. 생일이든 언제든. 이는 내가 즐기는 무언가를 스스로에게 선물하거나, 나를 아끼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단순히 나를 사랑하고 감사하게 느끼게 하는 무언가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소중히 여기고 긍정하는 친구, 파트너 또는 커뮤니티와 함께 있으면 양육으로 인해 생긴 감정적 공허함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남의 기대에 맞추어 살 필요도 없다. 소중한 내 자신이 가장 행복해 하는 일을 하자.
5. 내면의 상처 치유
- 문제 : 어린 시절의 감정적 상처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져 관계, 자기 이미지,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경험으로 인해 버림받거나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해결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있다.
- 해결책 : 이러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종종 상처의 깊이를 인정하고 전문적인 지원을 구해야 한다. 치료, 특히 인지 행동 치료(CBT)나 내면의 아이 작업과 같은 접근법은 이러한 초기 상처를 처리하고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음챙김이나 명상을 통해 자신과 연결하면 자기 인식과 감정적 해방을 촉진할 수도 있다.
나는 명상도 하고 병원에서 중증 우울증과 불안장애 치료도 받았다. 앞으로 아까운 내 인생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지 말고 나의 치유와 행복을 위해 사용하자.
궁극적으로,
이런 종류의 정서적 트라우마에서 치유되는 것은 여정이며,
자존감, 사랑, 그리고 당신의 존재에 대한 축하를 되찾기 위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괜찮습니다.
당신은 빚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이기때문에
인정받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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